워라밸 찾아 회사 떠나는 '유령'들

지난 3월 23일(현지 시각), 미국 매체 CNN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가 전날 밤 직원들에게 음성 메모를 보내 "과중한 업무 부담을 줄여 달라는 여러분의 요구를 수용하겠다. 관심사를 자유로이 공유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보도했습니다. 그는 신규 입사자가 금요일 밤 9시부터 일요일 오전 9시까지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토요일 규정'을 준수하는 동시에 신입 사원을 더 많이 뽑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솔로몬 CEO가 이러한 성명을 낸 배경엔 사내 주니어 애널리스트들의 단체 행동이 있었습니다. 입사 1년 차 미만인 애널리스트 13명이 주 95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업무 환경에 반발해, 동료를 설문 조사하고서 취합한 결과를 골드만삭스 경영진에게 제출한 것입니다.

/골드만삭스

이 보고 내용은 오래지 않아 언론과 SNS를 통해 회사 바깥에도 알려지게 됐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응답자는 "오랜 시간 근무한 탓에 항상 몸이 아프고 정신 건강도 최악이다. 가족과 친구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또 다른 사원은 “나는 열악한 위탁가정에서 성장했는데, 그때보다 지금 골드만삭스에서의 삶이 더 나쁘다"고 토로했다 합니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의 애널리스트 자리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전 세계에서 가장 선망받는 직장 중 하나죠. 당연히 각국에서 몰려든 우수한 인재들이 입사를 바라며 줄을 섰을 테고요. 그런 만큼 주니어 애널리스트 몇몇쯤 불만을 표한들 회사 측에선 그저 ‘싫으면 나가’를 외치면 그만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데요.

요즘 현지 분위기는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최근 투자은행에 매력을 느끼는 청년들이 줄고 있다며 “10년 전엔 와튼스쿨 MBA 졸업생 중 20% 이상이 투자은행에 취업했지만, 지난해엔 졸업생 중 12%만이 투자은행에 취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월 스트리트./게티이미지뱅크

물론 2007년 즈음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여파로 월가 자체의 신뢰가 급락한 것도 무시 못할 기피 사유이긴 했지만, 다수 언론은 ‘워라밸’을 추구해 격무를 피하는 풍조가 퍼지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애널리스트 업계의 인기가 떨어졌고, 반대로 실리콘밸리는 급격히 성장했다”며 “많은 테크 기업이 유연한 근무 환경을 무기로 젊은 인재를 빨아들였다”고 전했습니다. 이 매체는 유수한 미국 투자은행들이 근래에 신입 애널리스트 초봉을 16만 달러(약 1억 8800만원)까지 일제히 끌어올린 것도 이러한 현상과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업무 특성상 일을 줄이기는 쉽지 않으니, 대신 파격적인 대우를 해서라도 우수한 자원을 붙들고자 했다는 것이죠.


비단 금융계만이 인재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미국에선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연봉은 많지만 업무 강도가 높은 직장을 버리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 합니다. 심지어 취업문을 통과하고서 첫 출근날 얼굴을 비치지 않거나, 어느 날부터 문득 회사에 나오지 않고 연락을 두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합니다.

그러한 케이스가 워낙 많았던 탓에 현지에선 '고스팅(ghosting)'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습니다. 본래는 연인 사이에서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상황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요. 어느덧 피고용인이 사정 설명 없이 ‘잠수’해 버리는 꼴을 가리키는 말로도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단어는 지난 2018년 12월 초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에서 발간한 경제동향종합보고서인 '베이지 북(Beige Book)'에까지 언급되며 공신력을 얻었습니다. 미국 매체 워싱턴포스트(WP)는 글로벌 인력회사 로버트 하프의 조사를 인용해 지난 2018년 미국 전역 취업시장에서 고스팅 발생률이 과거에 비해 10~20% 늘어났다고 보도했습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워라밸을 찾아 떠나는 ‘유령’이 되며, 재계의 시름은 깊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8년 12월 초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국 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6.7%가 자질 있는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성장이 정체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존 그레이엄 듀크대 교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구하기 힘들어졌으며, 고용이 한계에 다다르면 성장에도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 들어 미국 기업들이 흔히 감행하는 ‘오버부킹’은, 이러한 고스팅에 대처하고자 내놓은 방편 중 하나라 합니다. 항공사가 고객의 취소를 예측하고서 아예 더 많은 예약을 받아 두듯, 기업도 채용 시점부터 필요 인력보다 약 10~20%를 추가로 뽑는 것이죠.

/게티이미지뱅크

물론 고스팅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인 워라밸 문제를 직접 타격하는 대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주4일제 확대’를 들 수 있죠. 예를 들어 지난 6월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 기업인 킥스타터(Kickstarter)는 내년부터 전 직원 90여 명을 대상으로 주4일 근무제를 실험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급여는 줄이지 않고 휴일만 주당 3일로 늘릴 방침이라 합니다. 미국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 집리크루터(ZipRecruiter)에 따르면 주 4일 근무제 일자리 비중은 최근 5년 사이 4배 증가했습니다. 또한 미국 인사관리협회는 자국 내 기업 중 27%가 이미 주4일제를 도입해 운영 중이라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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