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고전문학]일비를 허물어 버린 설

코로나 19가 한창이던 어느 날, 사장이 밖에서 돌아오니 직원들이 총무과 앞에 길게 늘어서 돈을 받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월급날과도 같았다. 사장이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어찌하여 급여일도 아닌 때에 몰려들어 돈을 받는가?”

직원들이 답했다.

“이것은 봉급이 아니라 일일활동비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찌 월급을 받고도 따로 돈을 챙긴단 말인가?”

사장이 성을 내자 직원들이 달랬다.

“식대와 유류비를 회사에서 지원해 준 덕에 영업을 맡은 이들이 거리낌 없이 멀고 험한 곳을 누비며 사업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통신비도 대 주니 고객과 통화를 길게 해도 요금 폭탄이 두렵지 않아 참 좋습니다.”

사장은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회사와 직원은 가를 수 없는 한 몸이니, 조직을 위해 일하는 근로자가 사재(私財)와 업무비를 구분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더군다나 무슨 놈의 돈은 그리도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냐. 옛적 공자(孔子)의 수제자 안회는 만대에 걸쳐 덕행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지만, 하루에 밥 한 소쿠리와 물 한 바가지 만으로도 족함을 알았다 한다. 미루어 보건대 군자의 삶을 영위하기엔 단사표음(簞食瓢飮)이면 실로 부족함이 없거늘, 그에 비하면 가치가 몇십 배에 이르는 금품을 매달 어김없이 수령하는 너희들이, 업무에 쓸 돈까지 따로 나누어 타 먹는 것은 하늘의 도리를 배반하는 사치이며 방종이 아니더냐. 몸담은 기업의 융성은 곧 너희의 발전으로 이어지거늘, 사원이 도리어 직장의 재정을 갉아 먹는 것은 너무나도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또한 통신은 감히 업무에만 쓴다고 호언할 수 있겠느냐? 사사로운 전화는 일절 받지 않으며, 회사가 통신비를 대주는 휴대전화엔 업무와 무관한 앱이나 사이트를 절대 들이지 않는다 장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임무에 효율을 더해주고자 제공한 도구로 매출 증대와 무관한 행위를 하는 것은 도둑질과 다름이 없으니, 이는 결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빨리 헐어 버리지 않는다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더니, 두려워한 임원들이 황급히 급여반납동의서를 돌리고선 뜯어낸 자금을 사장의 보수에 더했다. 그러자 사장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했다.


원본인 이규보의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壞土室說)’ 말입니다만, 우리나라 중등 교육 과정에선 대개 인간의 욕망과 편리 대신 자연의 질서와 섭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교훈적 작품이라 소개하는데요.

하지만 그 수필을 꼼꼼히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처럼 아름다운 해석을 내리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앞선 어레인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실제로는 휘하에 부리는 사람들이 겨울에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지내보고자 꾸린 움집을, 주인이 이치를 들먹이며 협박해 부수고는 그 잔해를 자기네 땔감으로 쓴 이야기거든요.

그로부터 무려 9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인간 사는 세상에선 이와 비슷한 일이 끊이질 않습니다. 지난해 4월 세계 최대 엔터테인먼트사 월트 디즈니는 코로나 19로 인한 매출 부진을 이유로 직원 10만 명에 대해 임금 지급을 중단한다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CEO를 비롯한 임원들은 연봉 삭감에 동참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정작 기본급의 몇 배에 달하는 보너스를 그대로 유지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디즈니 대신 쓰는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를테면 밥 차펙 월트 디즈니 CEO는 기본급 500만 달러의 절반(250만 달러)을 삭감하기로 했으며 모든 부사장급 임원도 임금의 20~40%를 감봉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차펙 CEO는 장기 인센티브(최소 1500만 달러)와 보너스(기본급의 300%)를 그대로 보장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경영진이 받은 돈은 총 15억 달러에 육박했습니다. 디즈니 가문의 상속자인 애비게일 디즈니는 자신의 SNS에서 “15억 달러나 되는 (임원들) 보너스를 보면 너무 화가 난다. 이건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월급 총액 3개월 치를 합친 거다”라며 “책임 있는 경영진이라면 성과를 반영해 자신들의 보너스를 오히려 깎아야 할 것이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간 연구재단인 정책연구소(IPS, Institute for Policy Studies)는 지난 5월 11일 공개한 보고서에서 신용 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Standard & Poor's)에 이름을 올린 대형 기업 500개 중 직원 임금(중간값 기준)이 낮은 100개사 중 51곳이 직원 임금을 깎고 CEO 보상은 늘렸다고 지적했습니다.

/IPS

이들 기업의 지난해 직원 임금 중간값은 전년보다 2% 감소한 2만8187달러였으나, CEO 보상액 중간값은 29% 증가한 1530만 달러에 달했다 합니다. 보고서 작성자인 세라 앤더슨 IPS 연구원은 “전염병 대유행(코로나 19)으로 직원들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임원들은 보수를 부풀리며 격차를 벌렸다”며 “저임금 노동자들은 그들의 고용주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시간, 일자리, 삶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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