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이 전부는 아닌 이유

80년대 북미 영화를 즐겨 보신 분이라면, 본격 상영에 앞서 나오는 예고편에서 흘러나오는 “In a world…”로 시작하는 중저음이 꽤 익숙하실 것입니다. 무려 35만개에 달하는 영화 예고편과 게임 트레일러 무비, 광고 등이 이 목소리를 거쳐 대중에 첫선을 보였는데요.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도널드 리로이 라폰테인(1940~2008), 통칭 ‘돈’ 라폰테인이라 불리는 미국인입니다. 그는 본디 녹음 엔지니어였으나, 1964년에 개봉한 영화 ‘Gunfighters of Casa Grande’ 예고편을 맡기로 계약했던 성우가 갑자기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대타를 맡았던 해프닝을 계기로 예고편 소개 일을 시작하게 됐다 합니다.

현역 시절 돈 라폰테인./ScreenCrush

배우 출신도 아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경험도 없는지라, 실력만 놓고 보면 라폰테인을 능가하는 배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생전 영화 예고편을 5000번 이상 녹음하며 업계의 전설로 군림했는데요.

그 배경엔 ‘경로 의존성’이 있었습니다. 신인의 발성이나 톤이 라폰테인보다 빼어나다 해서 사람들이 그쪽을 더 선호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이미 검증을 마친 믿을 만한 사람을 계속 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죠. ‘낯선 새것을 쓰는 리스크를 짊어지기보단 확실한 옛것에 기대는 쪽이 더 유리하다’는 상황을 워낙 교과서적으로 보여준 덕에, 학계에선 ‘라폰테인 효과’라는 용어를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사람인이 지난해 11월 389개사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56.8%가 재입사한 직원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기업 형태별로는 대기업(68.5%)이 중소기업(54.1%)보다 14.4%p 많았습니다. 응답한 기업 중 절반에 가까운 49.4%는 자기 쪽에서 먼저 나서서 재입사를 권유한 경험도 있다 했습니다.

재입사를 권한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추가 검증이 필요 없어서’(38%, 복수 응답)였습니다. 조직에서의 인사 관리에도 검증을 거쳤던 구관을 선호하는 ‘라폰테인 효과’가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는 것이죠. ‘급하게 충원을 해야 해서’(33.3%)를 이어 셋째 가는 사유로 꼽힌 ‘그만한 인재가 없어서’(30.2%) 또한 예전에 이미 내린 판단에 기댔다는 점에서 맥락이 비슷했습니다.

/사람인에이치알

직접 고용했던 적은 없더라도, 어딘가에서 한 차례 이상 검증을 마친 직원을 선호하는 기조는 취업 시장 전반에 걸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사람인이 330개 기업에 물은 결과 53.3%가 경력직을 신입보다 우선 채용한다 답했습니다. '신입과 경력과 관계없이 채용한다’는 기업은 35.5%였으며, ‘신입 위주로 채용한다’는 기업은 11.2%에 그쳤습니다. 또 응답한 기업 중 69.7%는 앞으로도 경력직 채용이 더 강화되리라 예측했습니다.

사람인 HR연구소는 “지난해 9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9 회계연도 기업체노동비용 조사’에 따르면 기업이 지출하는 상용근로자 1인당 월평균 노동비용은 534만1000원에 달했고,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9일 공개한 ‘우리나라 고용시장 5대 특징’ 보고서에선 정규직 사원을 해고하는 데 드는 퇴직금 등 법적 해고 비용이 2019년 기준 1주일 급여(주급)의 27.4배라고 설명했다”며 “가시적인 비용 측면으로만 따져도 ‘낯선 인물’을 기용하는 리스크가 상당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도 자연히 실력만 놓고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기존에 어떤 식으로든 확인을 받은 인재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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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LAB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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