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소통의 ‘실리콘밸리 시조’, 휴렛팩커드의 HP Way

허름한 차고에서 탄생한 혁신

198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팰로앨토(Palo Alto)시티 에디슨가 367번지를 ‘실리콘밸리 탄생지(The Birth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이름의 유적지(California Historical Landmark No.976)로 지정했다. 이곳은 스탠퍼드 대학 졸업 동기였던 빌 휴렛(William Redington Hewlett)과 데이브 패커드(David Packard)가 이후 유명한 글로벌 기술 기업으로 성장할 휴렛팩커드(Hewlett Packard, HP)를 처음 설립한 곳이다.

/www.hp.com

기계공학을 전공한 두 사람은 1939년에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캠퍼스 인근의 허름한 차고를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벤처기업의 첫 번째 사례로도 알려져 있다. 그들은 약 5백 달러의 자금을 지원 받았는데, 당시 물가로 코카콜라 1만 병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 현재 가치로는 대략 2천만 원 정도가 될 것이다. 초창기 HP는 오디오 발진기(Audio Oscillator)인 ‘A200’을 첫 상품으로 선보이며 대기업에 납품했다. 2차 대전 시기에는 음파탐지기, 레이더, 무전기 등 군수기계를 생산했고, 이후 소형 전자기기 및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확장했으며, 1960년대 컴퓨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기술력을 자랑했다. 지금은 주로 컴퓨터, 프린터, 서버, 네트워크 장비, 소프트웨어, IT 서비스 등을 생산 및 판매하고 있다.

HP는 급변하는 디지털 기기 및 클라우드 비즈니스에 대응하기 위해 2015년에 회사를 두 개로 분할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분사(分社)로서 전 세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음을 물론이다. 회사는 존속법인인 휴렛팩커드 주식회사(HP Inc.)와 신설법인인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HPE)로, 각각 독립된 기업으로 운영되며 HP Inc.는 주로 개인용 및 기업용 프린터, 컴퓨터 및 관련 제품에 중점을 두고, HPE는 주로 기업용 IT 서비스와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두 창업자는 20세기 말에 각각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젊었던 시절 회사의 기초를 닦았던 차고(Garage)는 현재 HP 홈페이지의 기업 인사이트 페이지 이름으로 남아있다.

/garage.hp.com

HP Way, 그들이 회사를 일으킨 방식

HP는 창업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경영 철학인 ‘HP Way’라고 불리는 조직문화로 유명하다. 창업자인 휴렛과 팩커드는 HP Way를 통해 직원들에게 존중, 협력, 혁신을 중시하고, 열린 기업 문화를 지향하는 가치 체계를 제시했다.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회사가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HP Way는 모든 글로벌 직원들에게 핵심적인 가치이며 자부심이자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이 회사 외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데이브 팩커드의 회고집 [The HP Way: How Bill Hewlett and I Built Our Company]가 1995년에 출간된 이후이다.

HP Way는 직원 개인의 존중, 혁신,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 등을 강조하는 HP의 조직 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오래 전부터 인정받고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조직심리학에서 유명해진 더글러스 맥그리거(Douglas McGregor)의 ‘Y 이론’과 유사한 점이 있다. 직원들이 본질적으로 일을 즐기며 책임을 선호하고 스스로 동기를 유발한다는 접근을 한다는 점이다. HP Way는 분산되고 협력적인 경영 방식을 강조했다.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의사 결정 프로세스에 기여할 것을 적극 권장하는 문화를 촉진했다. 이는 맥그리거의 Y 이론은 직원이 기회를 얻을 때 스스로 방향을 제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에 부합한다. 그리고 HP가 구축한 조직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이러한 모습이 관찰된다.

ㆍ신뢰와 협업: HP는 직원과 경영 간의 신뢰에 큰 중요성을 둔다. 개인이 자기 방향으로 나아갈 능력과 자기 통제능력이라는 Y 이론의 중요한 원리에 기반하여 신뢰는 직원 간의 효과적인 협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ㆍ직원에 대한 권한 부여: Y 이론은 직원이 개인 및 조직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욕구가 있으며 스스로 동기를 유발한다고 전제한다. HP Way는 이 개념을 수용하여 직원이 자신의 일을 책임지고 회사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이러한 관점은 HP가 1980년대부터 시행한 직원들의 개별 맞춤형 교육 시스템 개발에 반영되어 있다.
ㆍ개인 기여의 인정: HP Way는 직원들의 개인적인 기여를 인정하고 가치를 둔다. Y 이론은 개인이 자신의 일에서 인정과 만족을 찾으려는 것으로 가정하며, HP는 업적이나 혁신적인 기여에 대한 직원 인정 및 보상을 지원해 왔다.
ㆍ혁신과 위험 감수: HP Way와 Y 이론 모두 혁신과 위험 감수에 대한 문화를 촉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Y 이론은 도전적인 상황에서도 제반 여건이 갖춰져있다면 직원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앞장서서 짊어지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HP는 도전과 실패로부터의 학습을 촉진하는 문화를 유지해왔다.

HP Way와 맥그리거의 Y 이론은 각각 독립적으로 제창된 것이지만, 동 시기 은연 중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두 개념은 신뢰, 권한 부여 및 직원의 본질적 동기부여에 중점을 둔 공통 분모가 있다. 여러 해 동안 HP는 Y 이론의 여러 측면을 기업 문화의 실천으로 구현함으로써 협력, 혁신 및 개인 기여를 중시하는 작업 환경을 조성했다. 또한 Y 이론의 요소가 HP Way에 통합되면서 HP의 조직 문화를 형성하고 기술 기업으로서의 HP의 비약적인 성장에 영향을 주었으며 거대한 역사적 유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성공과 시련을 모두 함께 나누는 조직문화

사실 HP는 21세기 들어 급격하게 디지털, 모바일 기기 중심 체제로 변해가는 시장에서 경쟁 압력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창업자들이 물러난 후 외부 인사인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 마크 허드(Mark Hurd) 등 유명 외부 경영인을 CEO로 선임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경쟁사 컴팩(Compaq)을 무리하게 인수했고, 대규모 인원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익성은 일부 개선됐지만 HP Way의 정신은 크게 훼손됐다.이후 멕 휘트먼(Meg Whitman) CEO 체제에서 결국 회사를 둘로 나눈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으나, 그간 오랜 경영철학을 복원하려는 노력에 힘입어 현재 각각의 두 회사에서도 HP Way는 계속 살아숨쉬고 있다.

HP의 두 창업자는 ‘직원들은 원래부터 좋은 일과 창의적인 일을 하기 원하며, 회사가 환경만 제공해 준다면 얼마든지 그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존중, 신뢰, 소통, 팀워크의 가치를 HR에 녹여내려고 애쓰며 ‘조직문화’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HP는 1942년부터 모든 직원에게 건강 보험 비용을 지원했고, 1967년에 미국 최초 자율근무시간제를 도입했으며, 1990년에는 PS제도를 만들어 직원들과 회사의 성과를 공유했다.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한국 기업에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커피챗’과 소통을 위한 ‘개방형 자리배치’는 HP에서 이미 1960년대부터 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지금도 HP의 직원들은, ‘휴렛과 팩커드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처음 만들었던 음향장비도, HP의 상징인 프린터도 아닌, 바로 HP Way를 자신있게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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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LAB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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