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원의 거절 의사를 무시하고 생일 파티를 강행한 데다, 당사자가 이에 반발하자 해고를 통보한 미국 기업이 배심재판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미국 매체 뉴욕타임스(NYT)가 17일(현지 시각) 보도한 바에 따르면, 피해자인 케빈 벌링은 켄터키주 커빙턴에 자리 잡은 임상의료시험 회사 그래비티 다이어그노틱스의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입사한 지 10개월쯤 지난 시점이던 2019년 여름 즈음, 오피스 매니저에게 ‘내 생일파티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벌링은 불안장애에 시달리고 있었고, 사내 문화인 ‘직원 생일파티’로 인해 증상이 발현되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다른 동료 직원들은 회사 휴게실에 모여 벌링의 생일파티를 준비했습니다. 벌링은 이 사실을 알고선 공황발작을 일으켰고, 휴게실에 가는 대신 그의 차로 몸을 피했습니다.

다음날 직장 상사 2명이 벌링에게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이들은 면전에서 벌링의 행동을 비난했고, 벌링은 다시 공황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상사들은 일단 벌링을 집에 돌려보내고선 사흘 뒤 이메일로 해고 통보를 보냈습니다. 이유는 “면담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해 상사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벌링은 한 달 뒤인 2019년 9월 회사를 상대로 장애인 차별 소송을 냈습니다. 배심원단은 지난 3월 31일 “벌링이 장애를 이유로 불리한 고용 관련 조치를 당했다”며 회사가 밀린 임금 15만 달러(약 1억8443만 원)를 청산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 고통과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배상금 30만 달러(약 3억6885만 원) 등을 포함해 모두 45만 달러(약 5억5328만 원)를 지급해야 한다는 평결을 내렸습니다. 미국에선 배심재판일 경우 기본적으로 배심원 평결에서 원고승소 혹은 피고승소가 결정되며, 원고가 승소했을 경우 손해배상액 또한 배심원 평결이 좌우합니다.
이 사건은 지역 온라인 매체가 보도하며 현지에서도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판사는 아직 최종 판결을 하지 않았고, 회사 측은 평결에 이의를 제기한 상황입니다. 실제로 배심원이 내린 평결에 불복하는 당사자는 ‘평결번복판결 신청’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평결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경우, 판사가 배심원 평결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판결을 내려 줄 것을 법원에 신청하는 절차입니다.
그래비티 다이어그노틱스의 변호를 맡은 존 말리는 벌링이 회사 측에 불안장애에 대해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인 차별 소송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그의 불안장애는 장애인의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말리는 “벌링이 상사들과의 면담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조용히 해’라고 소리쳤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실질적인 위협이 있었기에 회사의 조치가 과도한 것은 아니었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래비티 다이어그노틱스 창업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줄리 브라질은 NYT에 "그들(면담한 상사 2명)은 신체적 위해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며 "둘 다 아직도 그 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명이 재판 외부 정보를 취득해 법원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도 이의를 제기한 명분 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회사 측에서도 직원들이 벌링의 의사를 무시하고 생일파티를 감행했다가 사달이 났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벌링의 변호인은 “그가 면담 때 주먹을 불끈 쥔 것은 공황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 전까지 벌링의 인사 평점이 재직 기간 내내 우수했고, 징계나 부정적인 평점 역시 전혀 받은 바가 없다 강조했습니다.